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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과 지주가 함께 세운 김제 금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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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빛 작성일19-09-20 05:04 조회4,4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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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과 지주가 함께 세운 김제 금산교회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역사, 신앙, 삶의 아름다운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ㄱ자 교회’로 불리는 전북 김제시의 금산교회는 소중한 전북지정문화재 제136호이지만, 이 교회를 세운 두 신앙인의 이야기가 더 귀합니다. 남녀, 양반과 머슴으로 구분하여 차별하던 봉건시대에 사랑과 평등, 섬김과 나눔의 기독교 가치를 실천한 장로 조덕삼(1867-1919)과 목사 이자익(1879-1958)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교통의 요지이고 사금광산이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이던 김제 용화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는 조덕삼이었습니다. 1897년, 6세 때 부모를 잃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경상도 남해를 떠나 멀리 금산까지 온 열일곱 살 이자익을 마부로 들어앉혔습니다. 테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는 어느 날 조덕삼의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서양선교사를 지켜본 조덕삼이 그에게 “살기 좋다는 당신네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왔습니까?”고 묻자, 그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선교사의 희생정신과 용기에 감동받은 조덕삼은 자기 집 사랑채를 내주어 예배를 보도록 했고, 이것이 1905년, 금산교회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영특하여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습니다. 이를 목격한 조덕삼은 자기 머슴이었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하고 신앙생활도 같이 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몇 년 후 조덕삼과 이자익은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행정과 설교를 맡아서 하는 직책)가 되었고, 1907년 금산교회의 장로선출 투표에 이들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시절에 주인과 머슴이 경쟁 상대가 되었는데 투표 결과는 더 놀라웠습니다. 머슴 이자익이 주인 조덕삼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경악한 교인들 앞에서 조덕삼 영수는 더욱 놀라운 발언을 하였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주는 먼저 선택된 머슴을 조금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장로가 된 이자익이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강단에서 설교할 때면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깎듯이 섬겼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머슴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자익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느라고 강단을 비울 때는 대신 설교하였고,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활비까지 지원하였습니다. 조덕삼은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1906년에는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교육에 나섰습니다. 아쉽게도 조덕삼 장로가 1919년 52세 젊은 나이에 별세하자, 아버지 뒤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이 된 큰 아들 조영호는 나라사랑을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게 했습니다. 이자익 목사도 강단에서 민족의식을 불어놓은 영향으로 금산교회 교인들과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영호 교장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북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2012년,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 장로(금산교회, 10대, 13-15대 국회의원)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장로(대전제일교회, 고분자화학박사)가 만났을 때,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히며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 우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 하고 정중한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자익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가끔 폭소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우리말이 서툰 선교사가 이자익을 ‘이자식’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목사 후보생으로 철저히 훈련을 받았고, 특히 이길함(Graham Lee) 교수에게 영향을 받아 항상 소외받은 이들과 동행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1915년 이자익은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적극적으로 청빙한 사람이 조덕삼 장로였습니다. 장로회 총회가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이자익 목사는 친일세력에 협조하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하며 은둔하다가 해방 후 남부총회의 재건운동에 참여합니다.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1924년에 처음으로 13대 총회장을 지냈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33대와 34대에 걸쳐 세 번이나 교회의 수장이 될 정도로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사표가 되었습니다. 명예욕에 눈이 멀어 파벌을 만들고 금권선거도 마다하지 않는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1952년에는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들도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1958년 79세로 별세하였는데, 이듬해에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자익 목사가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금산교회가 점점 부흥하자 1908년, 조덕삼 장로가 헌납한 땅에 일곱 칸짜리 한옥으로 기억 자(ㄱ)형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지난 2월 초, 30년간 금산교회를 지키신 이인수 목사님의 친절하게 안내를 받으며 금산교회에 들어가 보니, 추운 날씨에도 아늑하였고 오랜 소나무에서 솔향기가 풍겨왔습니다. ㄱ자 중심에 강대상이 있고 남자와 여자 교인들이 따로 앉은 양 날개가 있습니다. 출입문도 양쪽으로 있는데 전에는 중간에 휘장도 쳤다고 합니다. 당시 엄격한 유교사회의 남녀구분이라는 과제를 해결한 것으로, 기독교의 서양문화가 한국의 유교문화와 대립하지 않고 우리 토양에 맞게 토착화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6.25 전쟁의 참화에서도 금산교회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좌익계 청년들이 ‘우리 교회’라고 하며 지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길 건너 금산교회 전시관에는 많은 문서와 사진, 유물이 있어서 113년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풍금은 100년 이상 된 유물이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저항적 신앙생활을 한 교우들은 이런 풍금에 맞추어 힘차게 찬송가를 부르고, 숨죽이며 애국가를 배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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